한국의 노동운동을 얘기할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인물. 바로 전태일 열사입니다. 과연 20대 초반의 평범한 청년이었던 전태일은 어째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열사의 삶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948년 대구시 중구 남산동에서 2남 2녀중 장남으로 태어난 전태일 열사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그러나 가난은 그들을 가만 놔두지 않았습니다. 봉제 기술자였던 아버지가 파산하면서 1954년 가족들은 모두 서울로 상경하게 됩니다. 요즘도 그렇게지만... 그의 삶 전체를 무겁게 짓누르던 단어. 그것은 바로 가난이었습니다. 전태일은 이 빌어먹을 가난때문에 정규교육도 받지 못했는데 초등학교 4학년에 다니던 1960년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학교를 그만두고 행상을 시작합니다. 교육은 받지 못했으나 그 누구보다 현명하고 바른 사람이었던 전태일 열사
그는 17살에 평화시장 삼일사의 보조원으로 취직하여 결국 1966년에는 재봉사가 되어 통일사로 직장을 옮깁니다. 잠시나마 그의 앞날에 서광이 비추던 순간이었습니다. 이때쯤 가족들도 함께 모여살 수있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청계천 평화시장은 수많은 의류상가와 제조업체들이 모여있는 곳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은 인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당연히 환경은 열악할 수밖에 없었지요 얼마나 심각한 노동착취가 자행되었는가 하면 햇빛도 들지않는 다락방에서 하루 14시간씩 일을 할 정도였으니깐요 그만큼 이들은 말도 안되는 노동착취 , 인권유린에 내몰려 있었던 것입니다.
당사자인 전태일은 이를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가슴속에는 누구보다 뜨거운 심장과 정의감이 불타고 있었던 것이죠. 그는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를 해서 결국 근로 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된 그는 1969년 6월 동료들과 함께 바보회를 만들기에 이릅니다. 그땐 몰랐으나 이는 대한민국 노동계에 한 획을 그을 역사적인 사건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사업주들이 알게되면서 전태일은 해고되었고 이후 그는 어쩔 수 없이 공사판으로 내몰려 막노동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게 됩니다. 그 와중에도 전태일은 절대 노동운동을 포기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의 가숨속에는 더욱 뜨거운 열정과 정의감이 용솟음 치고 있었습니다.
1970년 9월 평화시장으로 다시 돌아온 전태일은 삼동회를 설립, 그리고 이를 통해 노동환경의 개선을 위해 애쓰기 시작했습니다.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 이런 일을 그냥 두고 볼리 없었는데 전태일은 업주들과 행정기관들의 방해공작으로 노동조합의 결성이 무산되자 그는 1970년 11월 13일 동료들과 함께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통해 노동자에게 제대로 된 보상없이 무작정 혹독한 노동만을 강요하는 현실을 고발하기로 했으나 이 역시 경찰의 방해로 무산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결국 이를 보다 못한 열사는 자신의 온몸에 석유를 뿌린뒤 불을 붙였습니다. 그 뜨거운 화염속에서 그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병원으로 실려간 그는 어머니게에 못다이룬 일을 맡긴다는 유언을 남기고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고 이후 경기도 마석의 모란공원에 잠들게 됩니다. 전태일 열사의 죽음은 많은 것을 남겼습니다.
한 청년이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알리고 싶었던 것, 그리고 지키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늘 우리가 누리는 수많은 자유와 권리가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생각할 수록 숙연해 지는 이름
전태일
당신이 남긴 정신과 그 용기를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셋바람에 떨지 마라
창살 아래 내가 묶인 곳... 살아서 만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