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1983년 2월 25일 어느 날 서울, 인천, 경기지역에 난데없는 공습경보가 울립니다.
"인천이 폭격당하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실제 상황 입니다. 북한기들이 인천을 폭격하고 있습니다."
이 방송이 나오자 서울, 인천, 경기 지역에 있는 모든 국민들은 건물밖으로 뛰쳐나와
정말 전쟁이 났나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무렵 이 후 오보임을 알리고 다시 한번 방송이 나가기 시작합니다.
"이 방송은 실제 상황 입니다. 서울 중부지역에 경계경보를 내립니다."
이 당시 상황은 북한의 전투기 조종사가 북한 평남 개천비행장에서 훈련 중 편대에서 이탈하여
시속 920km, 레이망을 피하기 위해 초저공비행으로 귀순을 시도 합니다.
북한에서 틈틈히 라디오를 통해 대한민국의 자유를 전해 들었던 이웅평 대위는
1983년 2월 25일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건 도박을 하게 됩니다.
전투기 조종사들이 인지하는 비행신호 중 기수를 좌우로 흔들면
"나는 전투의지가 없다"라고 신호를 인지한다고 합니다.
당시 인도했었던 조종사 박종헌 소령(훗날 공군참모총장)은 박종헌 소령이 전투기 비행 신호로
전투 의지가 없다는것을 확인하고 인도인접하여 안전하게 수원비행장에 착륙을 하게 됩니다.
당시 소련의 주력전투기였던 미그기를 몰고 옴에 따라 군사적 연구가치는 물론
최초로 북한 전투기조종사가 귀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여러가지로 가치가 있는 귀순용사 였습니다.
용공세력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킴은 물론 북한의 전투정보에 대한 수집까지
여러가지로 이웅평 대위의 귀순은 대한민국으로써는 땡큐 인 셈 이었죠
무엇보다도 가장 놀랐던 점은 훤칠하게 잘생긴외모와 건장한 체격
그리고 북한 내부의 소수 엘리트 군인이었다는 점
당시 탈북자라는 존재 자체가 굉장히 생소하고 어색했던 때
모든 사람들이 북한사람을 떠올린다면 머리에 뿔이 달린 빨갱이 내지는
적색분자, 차갑고 딱딱하며 굉장히 진지한 사람으로 인지를 하고 있었다면
이웅평 대위는 그 선입견을 모두 깨 버린 사람 입니다.
굉장히 털털하고 유머러스까지 하면서 결국엔 똑같은 사람이구나
체제의 영향 때문에 그렇게 변해가는것 일뿐 이라는 생각을 심어 주었습니다.
여의도에서 열린 이웅평 대위 귀순 환영회에서는 그 인원이 무려 130만명이나 될 만큼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습니다.
이웅평 대위의 공군 전투기조종사 경력, 이웅평 대위가 몰고 온 미그기의 군사학적 가치를 인정해
이웅평 대위는 북한에서의 군생활 경력을 그대로 인정 받아 대한민국 공군으로 재입대 하여
소령 계급으로 임관해 대한민국 공군으로써 생활을 이어 갑니다.
이웅평 대위는 탈북자의 신분이면서도 대한민국 국적이라도 오르기 힘든 대령의 계급까지 오르며
탄탄대로인 군생활을 이어나가지만 북한 태생이면서 탈북자 신분, 그리고 북한 보복의 두려움
공사 출신들과의 진급경쟁으로 받은 스트레스가 음주로 이어 져
결국 2002년 간경화로 사망을 하게 됩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1983년 2월 25일 그 날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