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당 합당은 1990년도에 일어난 민정당과 민주당 그리고 공화당이 서로 합쳐져서 민주자유당이라고 칭해 출범하게 된 사건을 뜻한다. 이 사건을 비판적인 목소리로 바로 3당 야합으로 불린다. 이 3당 합당 인해 그 당시 노태우가 대통령이었을 때 2년만에 거의 80퍼센트에 다다르는 숫자의 지지율을 선보인바가 있었다. 민주당은 13대 총선전에 총 27명의 국회의원을 탈락시키는 초강수를 선보였으며 과반수의 의석을 따내려고 노력했지만 5공청산을 염려해두고 있는 국민들의 반감을 샀기 때문에 25석빡에 따내지 못했다. 그 당시 민주정의당의 총재 자리를 맡고 있었던 노태우는 과반수의 의석을 차지했고 김대중을 자기의 편으로 만들었다.
당시 민주정의당은 득표율을 2등으로 차지했지만 59석에 머물렀고 원내 3당의 자리까지 떨어지게 된다. 그당시 김영삼은 김대중에 엄청난 경쟁심 때문에 이대로 가다가는 대통령의 자자리까 못갈 것 같다고 하여 민주정의당과 합쳐 김영삼의 조직까지 총동원해서 대권을 잡기에 힘을 쓴다. 하지만 노무현 김상현 등 8명이 3당 합당을 거절하였고 꼬마민주당으로 결성되었다.
신민주공화당은 13대 총선가운데 35석을 따냈지만 그들이 올표를 받을거라고 예상했던 충청도 지역에서 절반 가량만 확보하는 성과를 이루어 낸다. 당시 보궐선거에서 패하며 김종필에게 불만이 많이 쌓이는 당원들 때문에 김종필 또한 김영삼과 마찬가지로 대통령 선거에 도전자체를 할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여 합당에 나서게 된다.
따라서 결론적으로는 김영삼과 김대중의 단일적인 설이 실패되었다. 그 당시 새로운 민주자유당은 대다수의 표를 얻으며 218석을 확보하였으니 제 14대 총선때 계파들끼리 싸워 총 299석에서 절반도 안되는 득표를 받아 패배하였다. 하지만 14대선때 초원복집사건이 발생되는바람에 노태우를 경계하게 되었고 김영삼의 당권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 이후 민주자유당이 지방선거때 패배를 하자 통일민주당 하나인 형태로 줄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