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강릉무장공비침투사건에 대해서 다뤄보려고 한다. 그날의 기억은 간첩뉴스로 온 나라가 떠들썩 하던 1996년 9월 18일 강릉시 강동면 안안진리. "어! 저게뭐지!" 택시기사 이진규씨의 시야에 커다란 검은 물체가 들어왔다. 고래라고 보기엔 덩치가 너무 컸고 움직임도 없었다. "저..저거 잠수함이네...잠수함이야...저게 왜 저기있지?" 자세히 들여다보니 물체의 윤곽이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이씨는 곧장 신고전화를 걸었다. 강릉무장공비사건의 시작이었다. 공비들은 9월 14일 5시경 침투작전을 위해 우리 영해로 들어왔다. 사실은 정찰조를 내보내 남한의 군 정보를 수집하고 이들과 함께 다시 북으로 복귀할 예정이었으나 정찰조의 복귀를 기다리던 중 좌초된 끝에 결국 잠수함을 포기한 뒤 모든 기밀서류등을 파기한 뒤 상륙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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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8일 1시30분경. 공작원과 승조원 전원이 잠수함을 빠져나와 어둠속으로 모습을 숨겼다. 사실 최초 좌초된 잠수함을 발견했던 것은 해안경계초소의 초병이었다. 택시기사 이씨 이전에 이미 군이 먼저 잠수함을 발견했던 것. 그러나 군은 이 신고를 믿지 못했다. 명확한 사실확인이 담보되지 않고서는 함부로 명령을 내릴 수가 없었던 것. 사실 이것을 무조건 군당국의 탓으로 돌리기에는 우리군의 권위는 너무나 손상된 상태이다. 만약 초병의 말만 듣고 진돗개 등 경계대세를 발령했다가 사실이 아닌것으로 드러났다면?
그때에도 마찬가지로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을 테니 말이다. 물론 너무나 신중했던 우리 군의 태도 덕분에 북한침투조가 도주에 시간을 번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결국 연대장과 사단 정보과장이 출동하여 직접 잠수함을 확인한 후에야 진돗개 하나가 발령되었다. 강원도는 유독 무장공비의 침입이 잦았던 지역이다.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의 트라우마가 아직 남아있었다. 순식간에 강원도 지역 전체가 공포에 휩싸였다. 군은 군대로 도주하는 적을 어떻게 생포, 또는 사살할 것인지 고민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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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었던 것은 이들역시 육로를 통한 작전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듯 그리 기민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 이들은 이동중에 무수히 많은 흔적들을 남겼는데 아마 이들도 별다른 대책이나 작전없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저 도주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26명의 무장공비중 13명은 우리 군과의 교전중 사살되었고 11명은 항공수색중 사체로 발견되었다. 사망한 11명은 잠수함 좌초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정찰조에 의해 즉결 처형된 것이었다.또한 나머지 두명중 한명은 생포되었고 한명은 도주하였다. 우리군 역시 큰 피해를 입었는데 현역 군인이 12명 예비군이 1명 사망했으며 민간인도 4명이나 사망했다. 일일 전투병력만 4만2천명 연인원이 200만명이나 투입되었음에도 작전이 49일이나 걸렸던 것은 그만큼 우리군이 실제 작전능력에서 북한을 크게 압도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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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역시 북한이 저질러온 수많은 도발중의 하나일진데 이런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도발들을 잊어버린 국민들이 너무나 많은 듯 하여 안타까울 따름이다. 필자가 보기에 모든 사건의 배후이자 원흉인 북한 정부를 파트너로 인정하고 손을 맞잡자는 말은 너무나 나이브한 생각이다. 동포라는 허울좋은 명분으로 포장해봐야 테러단체를 지원하는 것은 결국 테러를 부르는 일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