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이 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폭거에 항의하는 민주화 투사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야만적이고 극단적인 억압을 가했는지 여실히 증명해주는 사건으로 결국 그 반동으로 추모집회와 규탄대회가 들불처럼 일어나 궁극적으로는 민주화운동을 촉발하는 6월항쟁으로 연결되었다. 86년 4월 1일 서울대 재학생 박종철 열사가 청계피복노조 합법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다 구속되었다. 그러나 이와같은 정부의 탄압도 그의 민주화 열망을 꺾을 수는 없었는데 그는 오히려 더 치열하게 학생운동을 이어나간다. 그러던 중 박종철 열사는 갑자기 들이닥친 대공분실 수사관에게 붙잡혀가게 되는데 이것이 이 비극적 사건의 시작이다.
박종철 열사는 황망하게도 연행 하루만에 조서실에서 사망하게 된다. 최초 경찰은 그의 죽음을 단순쇼크사로 은폐하려 했으나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의 기사와 중앙대병원 전문의 오연상의 의혹제기등으로 국민적인 관심이 집중된 상황에서 정부도 끝까지 진실을 은폐할 수는 없었다. 결국 국립과학수사 연구소의 황적준 박사가 부검결과를 발표하는데, 그 결과는 실로 충격적이었다. 박종철 열사의 몸에는 물고문과 전기고문의 흔적들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던 것. 설마설마 했던 일이 사실로 드러났을 때 그것이 주는 충격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충격파는 이내 국민들의 의식을 뒤덮었고 곧 분노로 치환되었다. 국민은 그렇게 또 한명 열사에 의해 눈을 떴다.
정부는 성난 군중을 달래기 위해 담당 수사경관들을 구속시키는 한편 내무부장관과 치안본부장을 전격 해임하는 개편에 나선다. 그러나 87년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에 의해 정부의 사건 축소 조작이 폭로되면서 그 규탄대회가 다시 들불처럼 피어오르게 되고 이는 철옹성같던 전두환 정부를 무너뜨리는 6월항쟁의 시발점이 된다. 결국 박종철 열사는 우리에게 민주화의 열망을 남기고 떠났다. 이게 이 뜨거운 열정을 어디에 어떻게 쓰는가는 순전히 남겨진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