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 그리고 진실 지금도 물론 그렇지만 동서 냉전의 시대였던 1060년대 남북한의 이념대립 역시 날로 심화되고 있었습니다. 지금에야 사회주의 혁명이란 것이 모두 신기루와 같은 것이고 몽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하게 밝혀졌으나 당시를 사는 이들에겐 이러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결국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며 이념을 강제하는 일이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졌습니다. 때문에 사회주의 이념의 확산을 마치 걸리면 치료가 불가능한 전염병이라도 되는양 경계하는것이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미국조차 도미노이론이라는 망령에 사로잡혀 엄청난 국력을 소비하며 전쟁에 뛰어들 정도였으니까요
더군다나 한국은 이념때문에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나라였습니다. 다른 어떤 나라보다 반공이념이 투철했고 당연히 북한은 타도해야 할 집단. 절대 믿어서는 안될 흉악한 짐승들로 여겨졌습니다. 실제 당시 북한은 빈번하게 무력도발을 해댔는데, 실제 판단력을 상실한 당시의 북한정권은 남한에 대한 적화통일의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으며 이런 속내를 공공연히 드러냈습니다. 무력도발은 그에 대한 분명한 메세지였습니다.
1968년 북한은 급기야 무장 게릴라를 보내 한국 대통령의 암살을 기도, 군통수권자를 습격했다는 점에서 북한이 그간 행해온 그 어떤 도발보다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정부는 이 말도 안되는 행위에 분노했으나 딱히 보복할 수단은 없었습니다. 먹고살기도 힘든 상황에서 전쟁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지요 또한 사실 경제적 상황이 그보다 나았다고 한들 딱히 다른 결정을 하지는 못했으리라. 현 상황에서 같은 일이 재현된다고 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보복수단이 그리많지는 않을테니 말이지요. 그러나 무력도발에 대해 그것도 국가 지도자를 향한 테러에 계속해서 침묵하고 있을 수는 없는 법이었습니다.
만약 다음번에도 같은 일이 반복되고 또 다시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한다면 한국이 호구로 보일 수 있었습니다. 다음에 또 이런일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대책이 필요했습니다. 결국 정부는 북한침투작전을 위한 부대를 창설하였는데 이 부대가 바로 속칭 실미도 부대입니다. 1968년 4월 1일 창설된 실미도 부대는 무려 3년 4개월간 특수공작훈련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끝내 본래의 목적에 맞는 작전 수행을 한차례도 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이미 수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남북한의 분위기도 많이 달라진 상황에서 별다른 명분도 없이 무턱대고 북파공작원을 침투시킬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실미도 부대원들은 북한의 재차 도발에 대한 즉각적인 응징을 위해 훈련된 인원들인데 북한이 북파공작원을 보낼만큼의 강력한 도발을 하지 않았기에 실미도 부대원역시 그대로 대기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실미도 부대원들의 인내심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들이 어떤 훈련을 받았냐에 따라서는 어쩌면 상당한 인내심을 발휘했으나 결국 그 한계를 넘어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실미도 부대원 24명은 기간병 18명을 살해한뒤 계속해서 서울로 향했으며 결국 영등포구 대방동까지 오는데 성공하였으나 군경과 총격전중 스스로 수류탄을 터트려 20명이 사망했고 나머지 4명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72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들이 단순히 탈출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기간병을 무려 18명이나 살해했다는 것인데 만약 이러한 일이 없었다면 어느 정도는 이들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안타까운 대목입니다. 이들이 어떤 부당한 대우를 받았건 사람을 살해한 것 까지 정당화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영화 실미도를 통해 이사건을 접했기에 다소 사실관계를 다소 왜곡해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영화는 영화일뿐이니 전부를 믿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본다. 또한 북한의 도발과 테러에 대한 북파공작원을 비밀리에 양성한 것 자체가 크게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정부에서 당연히 할 수있는 일이며 당시로서는 꼭 필요한 일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인권유린은 확실히 문제가 맞지만 특수부대의 운용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사건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