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기장

박정희 씨 일생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0.26 사태로 지금은 고인이신 대한민국 국민 박정희 씨는 한국의 5대부터 9대까지 대통령을 한 사람입니다. 일제 강점기 시기에 태어났고 3년동안 교사로 일한 경험이 있으며 추후에 군관학교에 입학을 하게 됩니다. 그는 1917년생으로 1979년도에 10.26 탕탕절에 김재규 열사에 의해 사망하였고 사망 당시 나이는 63살 이었습니다. 그는 1남 3녀를 두었고 총 1번의 이혼 경력이 있고 마지막 부인은 올림머리 육영수 입니다. 올림머리하니 요즘 가장 바쁘신 그 분이 생각이 나네요 박정희는 대통령에 취임하기 바로 직전 전역을 해서 최종 군대계급은 육군의 대장이었습니다. 전쟁시대에 태어난 군인답게 총 4번의 전쟁을 경험했다고 하네요




그리고 어떠한 계기에 의해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국가재건최고회의를 통해 국가 권력을 장악, 당시 전란이후에 무너져있던 국가를 재건하고 부정축재자를 척결하며 따뜻한 사회, 서민이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든다는 명목하에 깡패들을 소탕해 많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 시절엔 무능한 정치인이 많았던것도 사실이긴 하나 꼭 군이 나서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쨌든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 철권통치로 독재를 이어나가던 시절, 그리고 그의 인생이 막바지이던 1979년 사건이 터집니다.




10월에 시작된 부마 민주항쟁이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박정희는 부산 모든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였지만 상황이 더욱 더 안좋아지자 무력을 사용해 그 상황을 바로잡으려고 했습니다. 그 이후 그는 삽교천 준공식에 참가한 후 궁정동 안가에서 연회를 하던 도중 그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 열사가 총으로 박정희를 쏘았으며 김계원으로 인해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이송이 되었지만 바로 사망하였고 이 사건이 유명한 10월 26일 탕탕절 사건입니다.




김재규 열사는 추후에 체포 되었으며 재판 당시 민주주의는 무너졌으며 박정희는 개인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시민들이 더 이상 희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 이 같은 총살을 선택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미국이 배후에 있다는 설이 유력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총살 직전 김재규가 CIA 한국지부장을 만났기 때문에 이런 설이 돌았다. 하지만 김재규는 미국설을 부인하였고 미국 또한 강력하게 부인하였습니다. 음모론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이고 사실 관계는 확인된바가 없습니다. 어디에서도 쉽게 확인해볼수 있는 음모론 입니다.




여러가지 설들이 많지만 그중 또 유력한 설은 김재규와 차지철이 부마 항쟁 때문에 서로의 관계가 아주 안좋았다는 것이 또 하나의 설을 만들었습니다. 삽교천 행사도 중앙정보부 행사 였는데 경호실장인 차지철이 배척을 하며 참석을 못하게 해서 자존심에 심각한 상처를 입게 되어 벌인 우발적 범행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또한 미국정부가 박정희를 암살하기 위해 뒤에서 모든 것을 조종했다는 설도 있었지만 정확한 근거는 밝혀지지 않아 무마되었습니다. 그 당시 박정희는 미국과 인권문제로 다투었지만 사실상 박정희가 핵을 개발함으로써 미국의 신경을 자극했다는 것이 실질적인 사실이었습니다. 당시에 핵개발을 시도 했다는 내용은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묘사 된 바가 있습니다.



아직까지 미국이 박정희의 암살 배후라는 것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핵을 개발하기 위해 투입된 과학자들의 말로는 박정희의 죽음은 미국과 한국간에 어떠한 관계가 있다고 강력히 얘기하였지만 그 일을 말하면 미국으로부터 무슨일을 당할지 모르기에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있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탕탕절에 목숨을 잃은 박정희 씨, 국가를 재건하고 권한을 국민에게 위임한다는것은 지켜내지 못했지만 박정희 씨가 있었기에 지금 우리나라가 이정도로 살 수 있다는것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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