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기장

10.26 사태로 민주화의 열망이 극에 달했을 때, 어이 없게 등장한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의 군사독재는 군사독재에서 벗어나려 했던 대한민국의 희망에 물을 붓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분연히 맞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이 바로 광주에서 일어난 5.18 광주민주화 운동입니다. 그 신군부 핵심에는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등  하나회의 멤버인 육사 11기생들이 포진했는데요. 이들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정승화 당시 육군 참모총장까지도 빅정희대통령 시해에 가담하였다는  거짓죄명을 씌우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정승화총장까지도 제거, 마침내 군부의 모든조직과 세력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국무총리로서 얼떨결에 대통령직에 올랐던 최규화 대통령은 그야말로 허수아비에 불과했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채 권력의 중심에 앉게 된 대통령은 민주화세력과 군부세력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혼란의 시대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소위 3김이라 일컫는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은 최규하 대통령을 유신잔당이라 하여 퇴진하라는  압박을 가하며 학원자율화와 김대중전대통령을 위시한 당시 민주화 인사들의 사면 복권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그들의 요구가 이루어지면서 '서울의 봄'이 온 것처럼 보였지만.... 갑자기 찾아 온 자유는 자리를 잡지 못했고 군부독재에 억눌려 살았던 기성 세대들에게는 방종에 가까울 정도로 독재와 자유의 과도기 상태를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전두환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는 정권을 잡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10.26사태에 서울에만 내렸던 비상계엄을 제주를 제외한 전국으로 확대하며 김대중, 김상현 등 민주화 인사들을 체포했습니다. 이에 대학생을 중심으로 온나라가 들끓게 되자 전국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면서 군사독재에 맞서는 투쟁의 중심에 있던 광주에비밀리에 공수부대를 투입하므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서막이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학생들의 민주화의 열망을 같은 민족의 공수부대로  맞선 군부세력은 광주시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게 되었습니다.



당시 군부의 대학생만 제압하면 끝날 줄 알았던 공수부대 투입은 광주시민들의 극에달한 분노를 사게 되었고 군부에 분연히 맞선 아들과 딸들의 투쟁에 합류하였습니다.

이에 한때 군부의 철수 명령이 떨어지기도 했으나 당시  누군가의 반대로 철수대신 발포명령을 내림으로 역사상 한 민족끼리 씻을 수 없는 죄악을 광주시민들은 겪어야 했답니다.



이에 광주시민들이 예비군 훈련소무기고를 털어  소총으로 무장하자 군부세력들은 광주를 무력으로 완전고립시키며 탱크까지 투입하여 광주시민들을무장해제 시키며 시민군을 처참하게 진압하게 됩니다. 전두환세력의 포악은 처참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사망 218명 행불자 363명 장애를 입은 사람 5088명 등 7200명이라는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혔습니다. 역사적으로 전쟁을 방불케 할 전무후무할 사건일 것입니다.




이후 김영삼 정부때부터 5.18 쿠데타라 명명되었던 이 고귀한 희생의 사건을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름을 제대로 바꾸었고 광주시민들의 치유를 위해  특별법을 제정하고 5.18 기념공원도 세웠습니다. 이 일련의 일들이 그들이 그 시간에 겪었을 고통에 비하면 너무 미미하지만 그들로 인해 다시는 자유를  억압하려는 자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될 것입니다.


이들을 기리며 만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러 봅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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