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기장

장명부는 일본에서 내어난 야구선수이며 장명부의 일본 이름은 후쿠시 히로아키라고 한다. 그는 1950년도생이며 2005년도에 55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그의 본적은 한국 아산군이지만 국적은 일본이며 그의 출신지는 일본 돗토리다. 그의 야구 포지션은 투수였고 1968년도에 프로로 생활했고 그는 총 6개의 프로팀을 옮겨다니며 야구 생활을 했다. 그의 등번호는 총 3번 바뀌었으며 처음엔 34번 그리고 18번 마지막으로는 19번을 달았다.




그는 대한민국의 야구 역사상 다시는 존재하지 않는 시즌 우승 기록 30번과 400이닝을 성공시킨 전설이지만 혹사 때문에 비운의 투수로 기억에 남는다. 그 당시 제일 꼴찌 였던 슈퍼스타즈에 들어가 기적을 일으켰지만 나중에는 처절하게 쓰러진다. 그는 일본의 프로팀에서 구단이 연봉을 내리자 은퇴를 선언했고 그 이후 한국의 이글스 팀으로 들어가게된다.




그의 스승은 그의 한국행을 말렸지만 그의 아버지는 허락했고 이영구를 데려가야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그가 투수로써 정말 가망이 없다고 느껴진 1983년 롯데와의 시합에서 감독이 장명부를 나무라했지만 그는 온전히 상대팀의 실력을 평가하고 싶어서 직구로만 던졌었다는 얘기는 이후 장명부에게 너구리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다.




그의 진가는 4월에 열린 롯데와의 시합에서 발휘되었다. 그로 인해 10대 4로 승리를 쥐었으며 평상시에는 대충 공을 던지는 모습을 보여주며 위험할때는 전력을 다 쏟아 던졌다는 그의 스타일은 추후에 박수를 받았다. 그의 공의 속도는 145km였다. 그는 완급 조절이 가능한 선수였기 때문에 이처럼 작전을 세워 승리를 거머지게된다. 또한 많은 팬들은 장명부는 한국 선수들 머리위에서 논다고 표현했다.




이후 빙그레로 옮겼지만 성적은 정말 바닥이었다. 그리고 1년을 남짓 넘기고 은퇴를 하였다. 그가 은퇴하고 나서 인생은 내리막길이었다. 그는 1987년도에 일본으로 가려고 했지만 800만원 되는 세금을 내지않아 한국에 머물렀고 그 후 이혼을 하였다. 그는 결국 삼성과 롯데안에서 투수를 코치하는 역할을 했고 그가 탄생시킨 사람은 이상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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